김좌진·홍범도의 청산리대첩·봉오동전투
투먼대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닮은꼴

독립운동 2대 격전지
허룽(和龍)·투먼(圖們)
김좌진·홍범도의 청산리대첩·봉오동전투
투먼대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닮은꼴
▲ 봉오저수지. 실제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과는 8∼10㎞가량 떨어진 곳임에도 지금까지 전투 현장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사진=연합뉴스>

* 허룽(和龍 화룡, Helong)


[배만섭 기자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e톡뉴스)] 허룽 시가 우리나라에 중요한 관광 포인트가 되는 이유는 근처가 바로 청산리대첩이 벌어진 곳이 있기 때문이다. 허룽의 청산리대첩과 투먼의 봉오동전투지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2대 격전지에 속한다.

허룽 시는 두만강을 경계로 백두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여 북한의 함경북도와 양강도를 마주보고 있다. 서쪽은 높고 동쪽이 낮은 지형으로 되어 있고 해발 1,000m가 높은 산봉우리가 많이 줄지어 있다.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한민족의 비율이 55%로 높은 편에 속한다.

‘허룽(和龍)’의 명칭 유래는 '지형이 마치 용이 골짜기를 끼고 어루어진 형상'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09년에 현(縣)이 설치되었으며, 1988년에 시(市)로 승급되었다.

풍부한 물 자원으로 벼농사가 발달하여 평강벌 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은 중국 국무원(國務院)의 전공미(專供米)로 지정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다. 무공해 무오염 인증인 '녹색식품증서(1999년)'를 받아 지린성(吉林省)의 브랜드 제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황제에게 공급되는 쌀을 생산하는 고장'이라는 뜻의 '어미지향(御米之鄕)'이라고도 불린다.

청산리전투의 전적지를 비롯한 항일 독립운동의 유적들과 함께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 등 고구려와 발해 시대의 유적들도 많다.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우리나라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의 활동이 거세어지는 시기였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간도에 출병했다. 이후 벌여진 독립군의 전투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자 독립군 최대의 성과를 올린 전투가 그 유명한 청산리대첩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10여 회 차례 전투가 있었으며 그로인해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하여 1,200여 명이 사살되었고, 독립군은 약 1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총사령관의 김좌진 장군이 북로군정서를 지휘했으며, 홍범도 장군의 부대와 함께 협동작전을 펼쳐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 중 하나인 북로군전서군의 병력은 약 1,600여 명에 홍범도 휘화부대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한민회(韓民會)·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이 연합한 약 1,400여 명이 더해진 부대였다.

김좌진(金佐鎭, 1889~1930)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과 함께 ‘3대 맹장’으로 불리던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군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병정놀이를 즐겨했으며 항상 대장 역할을 도맡았다고 한다. 더불어 삼국지와 수호지를 탐독하여 전술과 무술연마에 관심이 많았다.

김광호 선생과의 인연으로 김 장군은 김석범과 김복한을 만나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정신을 가지고 되었다.

나이 17세였던 김 장군은 자신의 집에서 소유하고 있던 30명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상경하고 1905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상투를 자른 후,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가 1907년 홍성으로 다시 내려가 호명학교를 설립해 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실천했다.

1911년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군자금 모집을 하다가 서대문형수소에 2년간 수감되었다. 출감 후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1년 뒤에는 만주로 망명해 대한궁정서 총사련광으로 활동하며 간부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0년 9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바로 10월 21일부터 벌어진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하였다.

청산리대첩 이후 김좌진 장군은 대한독립단, 신민부와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0년 1월 24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심화로 인해 고려공산당 출신의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중국인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고 한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 투먼(圖們 도문, Tumen)


투먼은 용정과 함께 연길의 위성 도시로 두만강가에 위치하고 있고 강 저 너머로는 바로 북한의 남양 시와 접하고 있다.

국경도시인 투먼은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인근지역과의 무역과 교통의 요지로 발달해 왔다. 압록강에 비해 두만강의 강폭은 좁은 편으로 북한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어 한국인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인구의 약 60% 가까이가 조선족으로 구성된 투먼은 여진족의 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투먼 일대는 고구려-발해-요나라-금나라-동하국(東夏國, 1215~1233년)을 거쳐 왔던 지역으로, 조선 초기 두만강(豆滿江)은 투먼 강으로 불렸다. 여진족 언어로 ‘투먼’은 ‘두만강’을 뜻하고 ‘투문’은 협곡을 의미한다.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 가사에 있는 ‘두만강 푸른 물의 노 젓는 뱃사공’에서 나온 푸른 두만강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중국과 북한 쪽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물질로 인해 푸른 색은 이미 빛바랜지 오래되었다.

투먼 시는 중국 동북 지역 무역과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게 된 이유는 중국의 옌지(延吉), 북한의 청진(淸津),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를 연결하는 두만강 개발사업의 중심지에 위치해 물류 집산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만강 연안에서 유일하게 북한과 철도로 연결되어 있어 북한과의 교역이 활발한 편이다. 반면에 도시 자체는 작아서 투먼 시내 관광은 도보만으로도 충분한 편이다.

▲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에서 바라본 북한 온성구누 남양역 모습. <사진=연합뉴스>

투먼대교(圖們大橋)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면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남북한 초소 사이에 있는 소위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나오는데,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는 곳이 바로 이곳 투먼대교이다.

비록 남한과 북한사이가 아닌 중국과 북한사이의 다리이지만, 다리 중간에 노란 두 개의 실선 사이에 한 개의 붉은색 선이 그어져 있다. 한글로 ‘변계선(邊界綫)’이라 그려 놓은 붉은 선을 넘어가게 되면 북한 영토에 속하는 길로 전체 길이 100m의 시멘트 다리가 그곳이다.

북한 영토는 함경북도에 속하는 남양(南陽)으로 낮이면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데, 말을 걸면 상대방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편이다. 북한 측쪽으로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남양역사(驛舍)를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측 관문 위에는 전망대로 조성되어 있어 올라서면 투먼대교와 남영역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면 입장료 25위안을 지불하고 중국 국경수비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북한 국경 직전까지 다녀올 수 있다.

근처에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어 강을 거슬러 상류로도 진입이 가능하다.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북한군 초소가 보인다. 운이 좋다면 망원경으로 중국 쪽을 주시하는 초병들을 맨눈으로 볼 수 있다.

봉오동전투지(鳳梧洞戰鬪地)

봉오동전투는 청산리대첩과 함께 독립운동사 2대 격전으로 유명하다.

1920년 6월 6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던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부대와 일본군 제19사단 예하 1개 중대와 대대와 싸워 승리한 전투로, 독립군은 약 1,200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00여 명 정도였다.

1920년 6월, 일본 헌병대를 공경한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일본군은 중국 국경을 넘어오다 패배하였다.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패한 일본군은 간도 내의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에 연합 독립군은 선제공격 감행 후, 봉오동 골짜기에서 포위진을 구축한 후 유인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로 인해 독립군의 사기는 충전되고 아울러 병력의 보강과 군비확충에 주력할 수 있었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

평안북도 자성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조선 말기 의병활동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한일병합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독립군 사령관이 되었다. 3일간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 장군관 함께한 6일간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후에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 장군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포로가 되어, 1928년 소련 공산당 입당, 1938년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를 당해 집단 농장을 운영하며 살다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참고자료 : 중국관광청(C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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