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2월 18일 오전 6시 30분

2018년 올해는 매헌 윤봉길 의사(1908년 6월 21일생)가 탄신한 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 순국 직후의 모습. <사진출처=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최정아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그의 이야기를 잠시 정리해 본다.

<1932년 그해에>
4월 29일, 의거일
5월 25일, 사형선고
11월 18일, 일본 본국 압송, 오사카 독방 수감
12월 18일, 가나자와 구금소 이감
12월 19일 6시 30분,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
12월 19일 7시 40분, "..."

(자료제공: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오전 7시 50분경 양복에 스프링코트를 입고 도시락과 수통폭탄을 어깨에 매고 중국 상해시 홍커우공원(루쉰 공원)에 도착했다. 당시 공원에는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을 위해 상해에 거주 중인 일본인 약 1만 명과 상해에 파견된 일본군 제9사단과 해병대 병력 등 1만 2천 명, 그리고 기타 각국의 사절단과 초청자 등 약 3만 명이 모여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일반 군중들 사이에서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기념식 2부 축하식이 진행 중인 11시 40분경 단상을 향해 동쪽으로 이동해 도시락 폭탄을 땅에 내려놓았다. 수통폭탄을 들고 일본 기마병의 뒤로 이동해 단상과 약 4미터 거리에서 수통폭탄을 단상 위로 던졌다. 폭탄은 단산 한가운데에 떨어져 폭발했다.

이로 인해 거류민단 행정위원장인 가와바다 사다쓰구는 다음날 사망, 상해파견군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5월 26일 사망,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공사는 오른발 절단,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왼발 절단, 해군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는 오른쪽 눈 실명, 토모노 민단서기장과 무라이 주중총영사는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윤 의사는 수통폭탄 이후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계획했으나, 일본 헌병과 호위병에 의해 제압을 당하고 바로 체포되었다. 이어 몰린 군중들에 의해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당시 보도한 신문이 전했다.

이후 군법재판을 통해 의거 한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의 나의 당시 25세.

사형 집행이 잠시 미뤄졌다. 일제가 김구 단장의 은신처를 자백받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11월 18일, 일본 우편수송선 대양환에 의해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1월 20일, 고베항 도착 후 오사카로 이동, 오사카 육군위수형무소 독방에 약 한 달간 수감되었다. 

12월 18일, 가나자와 구금소로 이감되었고 이윽고, 12월 19일 오전 6시 30분경, 검찰관이 윤 의사에게 사형집행을 알렸고 유언을 물었다. 윤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가나자와 육군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윤 의사의 눈에는 흰 천으로 감싸있었고, 양팔은 십자형태의 형틀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10미터 떨어진 2명의 사수에 의해 엎드린 자세에서 미간부를 명중해 절명했다. 

이 때가 오전 7시 40분경.

▲ 상해의거 전 단상의 모습과 의거 후 체포된 윤봉길 의사. <사진출처=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1932년 10월 11일, 옥중 청위서 내용 요약>

문 : 네가 윤봉길인가?
윤 : 그렇다.

문 : 너는 금년 4월 29일 상해 신공원에서 있었던 관병식(열병식) 식장에서 폭탄을 던지기 이전에 유서를 쓴 일이 있는가?
윤 : 김구의 요구로 나의 약력과 감상 등을 써서 건네준 일이 있다.

문 :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라.
윤 : 금년 4월 27일, 내가 상해 신공원의 관병식장 모습을 미리 돌아보고 온 날 오후 6시 반경, 김구가 동방공우(東方公寓)에 있었던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김구가 말하기를 "이 밤이 자네의 마지막 날이니 자네의 약력과 감상을 쓰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는 평상시 사용하던 중국제 수첩에 연필로 썼으며, 딴 일을 쓴 것은 찢어 버린 후, 그 수첩을 김구에게 주었다.

문 : 유서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윤 : 나의 이력서와 내가 지은 고향의 '시량리가(枾梁里歌)' 및 나의 자식들에 대한 유서, 그리고 조선 청년에 대한 나의 감상을 수필문으로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년 4월 27일 오후 1시경, 내가 상해 신공원의 식장을 미리 돌아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밟은 잔디는 그래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 다시금 일어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 또한 힘이 강한 자에게 짓밟힐 때에는 이 잔디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대단히 슬픈 감정이 솟아 올랐다. 그때의 기분을 유서로 써 두었다.

문 : 유서 가운데 이력은 사실과 틀림없는가?
윤 : 기구가 갑자기 요구하였기 때문에 쓴 것이므로 연도에 다소 틀림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서를 쓸 때에도 나는 김구에게 그것을 거절했지만, 김구는 "연도쯤은 조금 틀려도 관계 없으니 자신의 이사만 똑똑하게 쓰라"고 말 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9시 경까지 약 2시간 반이 걸려서 썼는데 꽤 멋없는 글을 썼다.

문 : 너는 시(詩)를 쓸만한 소양이 있는가?
윤 : 나는 서당에 다니고 있을 당시 매일 시 공부를 했으며 또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내가 써서 발표한 것 가운데에는 여러 사람에게서 칭찬받은 것도 있었다. 멋있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어서 당시 지은대로 틀림없이 쓸 수 있다.

문 : 네가 고향의 '시량리가(枾梁里歌)'를 쓴 것은 누구인가가 부탁해서 쓴 것인가?
윤 : 누구에게도 부탁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혼자서 자작한 것이다. 그러나 곡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의 곡조를 썼다.

문 : 너의 유서를 김구가 세상에 발표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윤 : 그러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만일 발표하겠다고 미리 말했더라면 나는 충분히 생각한 연후에 상세한 자구로 좀 더 훌륭하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내가 갑작스럽게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자네는 정말 소양이 풍부하군 그래"라고 말하였다. 한 가지 빠트렸지만, 유서의 내용 가운데 김구에 대한 유서도 동시에 썼다.

문 : 이상과 같이 진술한 유서 이외에 따로 또 쓴 것이 없는가?
윤 : 그것 뿐이다. 더 없다.

문 : 너의 유서 문제에 대해서 그 밖에 진술할 것은 없는가?
윤 : 없다!

진술인 : 윤봉길

롯데백화점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2억 원씩 총 10억 원을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 후원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오는 23일(금) 서울시 양재동 소재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매헌 윤봉길 의사의 문학사상과 독립정신'의 이름으로 국내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한편,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와 회담을 하기 위해 중국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Itō Hirobumi, 伊藤博文, 이등박문)에게 총을 겨눴다. 안중근은 쓰러진 히로부미를 보고 태극기를 꺼내 들어 "코레아우라(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윽고 체포된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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