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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6.25 한국전쟁' 68주년] DMZ 표시판 보수중 북 기습, 곡사포 보복 통괘

기사승인 2018.06.29  18: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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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2월 당시 박정인 장군
적 GP 날려버리자 김일성도 벌벌

DMZ 표시판 보수중, 북 도발
곡사포로 보복 통쾌
백골사단 박정인 장군의 경우
적 GP 날려버리자 김일성도 벌벌
▲ 박정인 장군의 백골사단장 재직시 모습

정일의 선군(先軍) 폭력이 세상모른 채 광기를 부린다. 그는 아들 김정은에게 3대째 권력을 세습하여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협한다. 천안함 침몰사건 뒤 점차 드러나고 있는 정황에 비춰보면 김정일은 김일성을 능가하는 광기에 취해 있는 꼴이다.

강경대응에 김일성 이따금 사과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김일성은 6.25 남침에 실패한 후 수도없이 간첩과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놓고 남한 정부의 조작극이니 내부 반란이라고 덮어 씌웠다. 그렇지만 1968년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1.21 사태에 대해서는 한마디 사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내부의 좌경 망동분자들의 소행으로 그들은 모두 철직시켰으니 박 대통령에게 미안하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동해안에 북의 잠수정이 침투하여 난리가 났을 때 YS의 강경대응 태세에 굴복한 북측이 끝내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됐다.

▲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병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유엔군 병사들에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이에 대해 한· 미 양국이 단호한 태세로 대응하여 김일성이 유감표명으로 잘못했노라고 사과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이보다 훨씬 앞서 미군 장교들을 무참히 살해한 판문점 8.18 도끼만행 사건때 한·미 양국이 단호한 태세로 대응하다 김일성은 유감표명으로 잘못했노라고 사과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특전사 여단을 출동시켜 문제의 미루나무를 과감히 잘라버리면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상책”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당시 김일성은 미국 공군기와 7함대 등의 무력시위를 보고 6.25때 미군 폭격에 놀란 가슴이 또 한번 벌렁벌렁 뛰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김정일은 미얀마 아웅산 묘지 테러, KAL 858기 공중폭파 등 명백한 전쟁도발형 도발을 저지르고도 사과는 커녕 남조선의 조작극이니 김현희가 가짜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뻔뻔했다. 그로부터 김정일은 김대중, 노무현의 좌파정권 10년간 “남조선을 내가 가지고 논다”는 망상에 젖어 지금은 적화통일을 꿈꾸며 “천안함 사건으로 한방 먹였다”고 기고만장하려는 것이 최근의 행태가 아닐까 짐작된다.

김정일은 친북, 종북세력 믿고 호언장담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6.25 남침의 진상이 명명백백 드러난 이후에도 계속 북침전쟁이라고 우겨댔다. 남북한 대화를 계속하면서도 남침용 땅굴을 파 내려온 후안무치임이 잘 드러났다.

김일성 부자가 뭘 믿고 이토록 말도 안되는 억지와 거짓으로 행세할 수 있었을까. 북한 주민들이야 엉터리 역선전으로 눈과 귀를 막아 놓았으니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남한사회 내부에도 김일성 부자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일부 못된 정치인과 새빨간 지식인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어떤 전직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마저 6.25를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미화한 사실이 기억에 생생하다. KAL 폭파범 김현희가 가짜라는 소동을 벌여온 것도 그들이었다. 바로 대한민국에서 온갖 혜택을 받으며 편히 살고 있는 친북 종북세력들 임은 물론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오늘의 김정일이 3대째 권력세습을 통해 영구왕조 건설을 획책하고 있으니 바로 ‘제2의 6.25’ 상황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차 남북정상회담(2000년)을 위해 만났다. <사진@국가기록원>

DJ,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친북, 종북세력이 종횡무진으로 거침없이 행동하고 연평해전과 대청해전 및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 북의 연계설을 비난하고 우리 군과 정부에게 잘못이 있다는 식의 반역적 언행을 일삼고 있지 않는가. 지금 전개되고 있는 천안함 사건 처리문제가 중요하고 난감하다. 과거 1.21사태나 아웅산 테러 사건 등과 같이 군사적 응징을 이야기하면 전전긍긍하며 기겁할 판이다. 한·미 양국정부도 사건악화를 원치 않는다는 방향으로 조율하고 말 것이다. 김정일이 노리고 확신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김정일은 대청해전 패배를 계기로 ‘무자비한 보복’을 공언해 놓고 천안함을 폭파시켜 놓고도 큰소리칠 수 있다고 미소를 띄고 있지 않겠는가.

DMZ 표지판 보수 작업시 도발

지난 1970년대 어느 용맹장군이 북의 도발에 통쾌하게 보복 응징한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본다.

1972년, 함남 신흥 출신의 반공투사가 백골사단으로 불린 3사단장에 취임했다. 6.25때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박정인(朴定仁) 장군의 이야기다.

백골사단이 1973년 2월, 정전협정 절차에 따라 북측에게 통보한 후 춘계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착수했다. 이때 북측은 남북 분계선 바로 북측에 559 GP를 설치하고 대남비난 심리전을 펴왔다. 백골사단은 적의 심리전에 말려 들지 않으려고 인내했지만 북측이 우리측 표지판을 제거하는 협정 위반행위로 나왔다. 당시는 남북협상이 진행 중이라 상호 비방방송마저 중단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분노한 박 사단장은 정보참모 조정채 중령에게 표지판 보수작업 강행을 지시하여 작업을 완료했다. 그러나 우리측 장병이 귀대하는 순간, 북의 기습으로 대위와 하사 등 2명이 중상을 입었으니 전쟁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박장군도 마이크를 통해 사격중지를 요청하며 계속 사격하면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북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사단 155미리 곡사포로 적진강타

참다못해 박 장군은 사단 관측기를 공중에 띄워 적진을 관측시켜 559 GP에다 105미리, 155미리 곡사포를 조준, 포격하여 뭉개버렸다. 이어 연막탄을 발사하여 부상 장병을 구출, 귀대시켰다.

이 같은 통쾌한 응징 5분 뒤 1군 사령관 최세인 대장의 격려전화가 걸려 왔지만 10분 뒤 군단 사령부는 ‘무리한 사격’ 운운하며 엉뚱한 지시를 내렸으니 믿기 어려웠다. 분이 덜 풀린 박 장군은 이날 밤 사단 트럭들을 동원하여 전조등을 밝힌 채 DMZ 남방 한계선으로 진출시켜 당장 적진을 돌파할 기세를 보여줬다.

이때 북측에서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김일성이 너무나 놀라 전군에 비상 동원령을 내린 사실도 드러났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에서도 “북측의 정전협정 위반으로 부상병 구출을 위한 자위적 작전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박 장군은 사단장직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당시 한미 양국은 김일성의 무모한 전쟁도발 구실을 막기 위해 전투 잘하는 장군으로 소문 난 그의 지휘봉을 앗아 버렸던 것이다.

사단장 해임 후 ‘왕별’ 칭호

박 장군이 사단장 이임식 날 “백골사단 장병들의 무운장수를 빈다”는 이임사를 마치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사단 군악대가 ‘이별의 곡’을 연주했다. 떠나는 사단장에 대한 장병들의 가슴이 울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속부관 이계복 대위(ROTC)가 떠나는 사단장에게 “장군님은 진정한 조지 패튼입니다”라고 울먹였다. 2차 대전시의 미 전차군단장 조지 패튼장군의 용맹성을 가르킨 말이었다. 이어 그날밤 수행부관 임영호 준위가 5성 별판을 집으로 가져왔다. 별 하나 준장에게 맥아더 원수의 5성과 같은 왕별을 선물한 것이다. 이때부터 박 장군은 ‘왕별’로 불렸지만 이미 ‘풍운의 별’이란 칭호도 받고 있었다.

박 장군은 육사 6기생으로 임관됐지만 장군진급 때마다 탈락하여 ‘만년 대령’ 소리를 듣다가 맨 마지막에 준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장군으로 진급한 뒤에도 주월 맹호사단장 등 예정된 보직에서 낙마하다가 월남 반공청년들의 뿌리인 백골사단장에 부임했다가 도중에 해임됐으니 ‘풍운의 별’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으로 평양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함남 도민회 이상순 회장에게 북의 정치보위부 간부가 찾아와 “함남 신흥 출신 박가라는 요란한 사단장이 지금 뭘하오”라고 묻더라고 한다. 이 회장은 이때 “나는 기업인이라 잘 모르오”라고 대답했지만 북측이 백골사단을 얼마나 무서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총검술 훈련방향도 적을 향하라

박 장군이 백골사단장 취임에 앞서 1군 사령부 한신 대장에게 신고했더니 “김일성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단이 백골사단”이라고 말하고 “지금은 야전군 전투서열 꼴찌에 머물고 있으니 최단시일내로 1위로 만드시오”라고 훈시했다. 이때 박 장군의 가슴이 펄펄 뛰었다. 사단장 취임식 날 “6.25때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저격능선과 철의 삼각지대를 사수한 이곳 사단장에 취임하여 감개무량하다”고 한마디 하고는 바로 전투태세 훈련에 돌입했다.

▲ ‘살아서도 백골, 죽어서도 백골’ 구호 앞에서… <사진@이코노미톡뉴스>

첫날 사단장 지휘지시 제 1호가 ‘전 장병 철모착용이었다. 전투태세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지시였다. 이어 철책선 순시에 나서 소대 막사 내부 소총걸이에 자물통이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모든 총가의 자물쇠를 파괴하고 전 장병은 실탄을 장전하라”고 지휘지시 2호를 내렸다. 당시 야전에서의 총기사고 예방을 위해 소총걸이 총가를 모두 자물쇠로 잠가 뒀었다.

박 장군이 돌아서 나오면서 다시 “모든 장병들의 경례구호는 ‘백골’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부임 이튿날에는 각 부대 총검술 훈련을 시찰하다가 총검의 방향이 남쪽으로 향한 것을 보고 “부모 형제들에게 총검을 드리대느냐”며 호통치고는 모든 총검은 적의 방향으로 바꾸고 야외 변소의 용변방향도 김일성 쪽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몇일 뒤의 지휘지시 제 4호는 일본군의 잔재인 구타금지, 도박금지 및 외상술 금지였다. 그리고 장병들의 월급은 가정으로 우송토록 지시했다. 이 때문에 인근 주점 등에서 민원이 빗발쳤지만 박 장군의 지시는 흔들리지 않았다.

죽어 백골이 돼도 조국과 민족 수호신

군기확립 석달 뒤 박 장군은 ‘백골용사 선서문’을 제정 장병들의 전출입 신고 및 부대 행사시에 큰 소리로 낭독토록 지시했다.

▲ 3사단 백골부대 신병교육대 대대장에게 입소 신고를 하는 걸그룹 리브하이 신아와 보혜

① 백전백승의 백골사단 용사임을 영광으로 삼는다. ② 죽음을 무릎쓰고 명령에 복종하고 책임완수로 조국과 민족에 충성한다. ③ 모든 법규를 준수하고 전우를 사랑하며 모든 일은 ‘전투기준’으로 생활한다. ④ 훈련을 실전 삼아 일당백의 전기를 연마한다. ⑤ 화랑도 정신으로 실지를 회복하여 통일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⑥ 죽어서 백골이 돼도 조국과 민족의 수호신이 되어 민족사에 이름 석자의 명예를 남긴다.

이처럼 백골정신에 투철했던 박장군은 함흥고보 시절 반공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남쪽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장교가 됐다. 6.25때는 대대장으로 승진하여 압록강변까지 북진했지만 두 차례나 포로로 잡힌 신세가 됐다. 두 번째로 중공군 포로가 됐을 때 탈출하며 비상식량으로 연명했던 옥수수를 잊지 못해 지금도 그때의 옥수수를 벽에 걸어놓고 그때를 회상한다.

천안함 침몰사건을 보면서 박정인 장군의 용감무쌍한 대북 응징 보복의 교훈을 상기하도록 당국에 권고한다.

배병휴 [이코노미톡뉴스 회장] econotalki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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