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전쟁영웅 몽끌라르 장군
파병부대 지휘관 자칭
지평리 전투(1951.2.13.-2.15)승리

대한민국 자유수호 천사(Monclar)
몽끌라르 장군과 지평리전투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불세출의 전쟁영웅 몽끌라르 장군은?
▲ 육군중장 몽끌라르 장군

몽끌라르 장군의 본명은 마그랭 베르느레이(Magrin Vernerey)며, 헝가리 이민출신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 출생하였다.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생시르(Saint-Cyr)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세계 제 1, 2차 대전의 각종 전투에 참전해서 20여개의 각종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914년 8월 5일 장군은 보병 제60연대에 배치되어 전투를 하였고, 대위계급으로 프랑스 최고무공훈장 레지옹도뇌르의 기사장과 11개의 표창을 수상하면서 전쟁을 끝냈다. 7번 부상을 당하여 상이군인연금 등급 90%에 도달하였고 총탄에 의한 엉덩이 파손, 수류탄 폭발에 의한 오른팔 골절, 2회의 중요한 두부 개두술(천두술), 가스에 의한 두 눈의 화상치료와 수술을 받았던 1급 상이용사였다. 제2차 세계 대전당시 1940년 5월 13일 노르웨이의 비제르비크(Bjervik)전투에서 그 유명한 제13외인연대를 지휘해 적을 공격하여 수많은 연합군 포로들을 구출하였고 동시에 10대의 쌍발비행기를 비롯하여 자동화기와 수많은 장비들을 노획하였다. 또한 5월 28~6월 2일간의 나르비크(Narvik)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대독일전에서 유일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60여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구출하고 400명이 넘는 독일군 포로, 10문의 대포, 중요한 전쟁물자들을 노획하여서 그 공로로 십자 대 훈장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갈등이 생기자 런던으로 가서 이름을 프랑스 중서부 뚤루즈(Toulouse)지역 조상들의 본고장 지명인 몽끌라르로 바꿨다. 그는 외인부대장으로 재직하면서 이탈리아 해군대장을 포함해 1만4천명의 적군을 생포하고, 마사우아(Massaoua)항을 점령해 에리뜨레(Erythree) 전투를 종결지었다.

파병부대 지휘관 자칭
▲ 6.25전쟁에 중령으로 참전했을때의 육군중령 몽끌라르

1950년 6․25한국전쟁당시 프랑스 정부가 한국에 파병문제를 논의하는 광정에서 그 규모가 대대급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몽끌라르 장군은 파병부대의 지휘관을 자청했다. 이에 르죈느(Lejeune) 국방부차관은 몽끌라르 장군에게󰡒내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대는 육군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자, 몽끌라르 장군은󰡒저는 육군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로써 몽끌라르 장군은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초대 지휘관(1950.11.29.-1951.11.30)을 역임했다. 몽끌라르 장군은 이 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4성 장군(프랑스는 준장 2성, 소장 3성, 중장은 4성, 대장은 5성임)의 계급장을 포기하고 3개의 금색과 2개의 은색 줄무늬로 혼합된 중령계급장을 달았다. 당시 계급이 육군중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 파병되는 대대규모의 부대를 지휘하고자 스스로 장군계급과 직을 버리고 중령계급장을 달 만큼 군인정신이 충일했다. 

한마디로 그는 백전노장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1년 후 계급정년으로 귀국하였으며, 전역 후 10년 뒤인 1962년에 파리의 앵발리드(Invalides) 관리를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임기 5년의 관리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2년 뒤 1964년 6월 3일 72세 때 재직 중에 사망 하였으며, 관례상 관리사령관으로 재직 중에 사망할 경우에는 앵발리드 내의 성 루이(Saint Louis) 성당 지하 납골당에 그 유해를 안치하게 되어있기에 장군은 그곳에 영면하고 있다. 당시의 프랑스 샤를르 드골(Charles de Gaulle)대통령은 군사박물관이 있는 앵발리드(Invalides)의 생루이(Saint-Louis) 성당에서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는 등 눈물을 흘리면서 장군의 위국헌신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표했다.

지평리 전투(1951.2.13.-2.15)승리와 중요성

지평리 전투에서 전설의 전쟁영웅 몽끌라르 장군이 노련한 백전용장의 지혜를 가지고 인해전술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물리치고 지평리를 성공적으로 사수함으로써 중공군의 2월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우리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다시 한 번 구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UN군의 대중공전에서의 첫 번째 승리였다. 이 지평리 전투의 승리는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6․25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2대전투로 꼽히며, 또한 당시 참전하였던 프랑스대대가 6․25한국전쟁에서 거둔 가장 귀중한 승리로 평가되고 있으며, UN군의 전사를 통해 10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만약에 이 전투에서 실패하고 50여 km 이상 남쪽으로 더 밀려났었다면 미 합참본부는 유엔군을 한국전에서 철수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지금 생각하여도 몽끌라르 장군과 프랑스 대대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프랑스대대의 한국전참전 결정에서부터 지평리 전투의 승리를 가져오게 한 하늘이 우리나라에 내려주신 전설의 전쟁영웅 몽끌라르 장군을 우리는 자자손손 잊지 않고 감사하고 공덕을 흠앙하여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국민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6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3성 장군에서 스스로 중령계급으로 강등하여 프랑스 대대병력을 지휘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여 영하 -20도의 혹한에서 밤을 지세우면서 부하들을 독려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불세출의 전쟁영웅 몽끌라르 장군을 2011년 2월에 국가보훈처는 6․25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프랑스 내에는 장군에 대한 흠앙의 헌정물(기념비, 광장, 거리등의 명명)등이 다수 산재해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인 우리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시각적으로도 자자손손 대를 이어서 영원히 장군을 흠앙해나가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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